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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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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맘루크 술탄국은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이슬람 왕조이다. 맘루크는 노예 출신 군인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붕괴 이후 권력을 잡고 바흐리 왕조와 부르지 왕조를 거치며 통치했다. 맘루크 술탄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었으며, 이슬람 세계의 문화, 예술, 학문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2. 국호

'''맘루크 술탄국'''이라는 이름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붙인 명칭일 뿐이다.[1][2] 바흐리 왕조 시대의 아랍어 사료들에 따르면, 이 국가는 '''튀르크국'''(Dawlat al-Atrak|다울라트 알 아트라크ar 또는 Dawlat al-Turk|다울라트 알 튀르크ar) 또는 '''튀르크인의 국가'''(al-Dawla al-Turkiyya|앗 다울라 알 튀르키야ar)라고 불렸다.[3][4][1] 이후 부르지 왕조가 개창된 뒤에는 '''체르케스국'''(Dawlat al-Jarakisa|다울라트 알 자라키사ar)이라고도 불렸다.[1] 이러한 이름들은 통치자였던 맘루크들의 출신 민족을 강조한 것이며, 당대 맘루크 치하의 역사학자들은 부르지 시대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맘루크들의 노예로서의 지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1]

3. 역사

13세기 중반,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가 급사했다. 살리흐의 충실한 맘루크 군단인 바흐리야 맘루크는 샤자르 알-두르를 지도자로 삼아, 1250년 마수라 전투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퇴하고 루이 9세를 포로로 잡았다.[33] 이후 쿠데타를 통해 투란 샤를 살해하고 샤자르 알-두르를 여성 술탄으로 세웠다.[33] 무슬림들의 반발로 샤자르 알-두르는 아이바크와 재혼하고 술탄 자리를 양위했다.[34] 이로써 샤자르 알-두르 또는 아이바크가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으로 여겨진다.

아이바크는 바흐리야 동료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맘루크들을 등용했으나, 샤자르 알-두르와 대립하다 암살당했다.[35] 샤자르 알-두르 역시 살해되었고, 쿠투즈가 술탄이 되었다.[35]

1260년, 훌레구의 몽골 군대가 시리아로 진격하자,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화해하고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살해하고 술탄이 되었다.[36]

바이바르스일 칸국십자군 국가 잔존 세력에 맞서 싸우며 맘루크 왕조의 영토를 확장했다. 아이바크 이후 맘루크 왕조 전기는 대부분 바흐리야 출신이 차지하여 바흐리 맘루크 왕조라고 불린다.

바이바르스 사후, 바라카, 살라미시가 연이어 술탄이 되었으나, 칼라운에 의해 폐위되고 1279년 칼라운이 술탄이 되었다.[37] 칼라운과 그의 아들 아슈라프 칼릴은 시리아에서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38]

칼라운 사후, 아슈라프는 살해되었고,[39] 나시르 무함마드가 술탄이 되었으나 폐위되었다.[40] 이후 복위된 나시르는 1310년 쿠데타를 일으켜 친정을 확립했다.[41] 나시르는 아미르에게 이크타(징세권)를 수여하고, 킵차크 칸국과 동맹, 일 칸국과 화해를 통해 내외 정세를 안정시켰다. 카이로는 국제적인 상업 및 학술 도시로 번영했다.

1324년경, 만사 무사의 메카 순례 중 카이로 방문으로 금값이 하락했다. 나시르의 사치로 재정이 어려워지고 맘루크 세력이 강대해졌다.

나시르 사후, 그의 아들들이 꼭두각시 술탄이 되었고, 대아미르와 아타벡을 겸임한 유력 아미르들이 실권을 장악했다.[42]

1382년, 바르쿠크는 칼라운 가문의 술탄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43] 바르쿠크는 체르케스인 중심의 부르지 군단 출신 맘루크였으며, 이후 맘루크 왕조는 부르지 맘루크 왕조 또는 체르케스 맘루크 왕조로 불린다.

부르지 맘루크 왕조에서는 술탄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유력 아미르들 간 상호 선출로 술탄이 결정되었다. 이로 인해 아미르들은 군벌을 형성하고 파벌 싸움을 벌여 내분이 심해졌다.

15세기 흑사병 유행으로 카이로의 번영이 쇠퇴하고, 16세기 초 인도양 무역에 포르투갈이 참여하면서 맘루크 왕조의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509년 디우 해전에서 맘루크 해군은 포르투갈 함대에 패배했다.[44]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도 심화되어, 1516년 마르주 다비크 전투에서 셀림 1세에게 대패했다.[45] 이듬해 리다니야 전투에서 카이로가 함락되며 맘루크 왕조는 멸망했다.[46]

3. 1. 기원

맘루크해방된 노예로, 가정 노예인 구람|기르만ar과 구분된다. 무술, 궁중 예절, 이슬람 과학 등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받은 후 해방되었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그의 가정을 섬길 것으로 기대되었다.[9] 맘루크들은 적어도 9세기부터 시리아와 이집트의 군사 조직의 일부였으며, 툴루니드 왕조와 이크시디드 왕조처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통치 왕조가 되기도 하였다.[9]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 아이유브 통치하의 이집트 군대에서 맘루크 연대는 중추를 이루었는데, 살라딘 () 치하에서 시작되어 파티마 칼리파의 흑인 아프리카 보병을 맘루크로 대체했다.[9] 각 아이유브 술탄과 고위 에미르는 사적인 맘루크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9] 아이유브에 봉사하던 대부분의 맘루크들은 킵차크계 중앙아시아 출신의 킵차크 투르크였으며, 봉사에 들어가면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를 배웠다. 맘루크들은 종종 '아버지'라고 부르는 주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고, 그 대가로 노예라기보다는 친족처럼 대우받았다.[9]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술탄 알-카밀 ()의 부재 중에 이집트 총독 나이브|ar로 재직하면서 1229년까지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에서 약 1,000명의 맘루크(그중 일부는 자유민)를 확보했다. 이 맘루크들은 주인의 이름을 따서 '살리히야'(단수 '살리히')라고 불렸다.[9]



알-살리흐는 1240년에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고, 즉위하자 많은 수의 맘루크를 해방시키고 승진시켜, 전임자들의 에미르들로부터 몰수한 이크타ʿ앗|이크타ar (봉토와 유사)을 통해 그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집트에 매우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준군사 조직을 만들었는데, 역사가 윈슬로 윌리엄 클리포드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집트를 "살리히가 지배하는" 곳으로 여겼다고 한다.[9]

13세기 중반,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가 급사했다. 살리흐의 충실한 맘루크 군단인 바흐리야 맘루크는 살리흐의 부인이자 노예 출신 여성이었던 샤자르 알-두르를 지도자로 삼아, 1250년 마수라 전투에 이어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루이 9세를 포로로 잡고 십자군을 격퇴했다. 이후 쿠데타를 통해 살리흐의 아들(샤자르 알-두르의 아들이 아닌) 투란 샤를 살해하고 샤자르 알-두르를 여성 술탄으로 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33] 여성 술탄에 대한 맘루크 이외의 무슬림들의 저항이 거셌기에, 같은 해 샤자르 알-두르는 바흐리야의 최고 실력자인 아이바크와 재혼하고 아이바크에게 술탄 자리를 양위했다.[34] 이후 맘루크 출신자들이 이집트 술탄이 되면서, 샤자르 알-두르 또는 아이바크를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으로 여기게 되었다.

아이바크는 바흐리야 동료 맘루크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맘루크들을 등용하여 권력을 확립했지만, 바흐리야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유지하던 샤자르 알-두르와 대립하다가 암살당했다.[35] 샤자르 알-두르 역시 곧 살해되었고, 아이바크의 맘루크들 중에서 쿠투즈가 부상하여 술탄이 되었다.[35]

1260년, 몽골 훌레구의 군대가 시리아로 진격하자(몽골의 레반트 침공), 쿠투즈는 바흐리야의 지도자 바이바르스와 화해하고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 후 귀환 길에서 다시 쿠투즈와 대립한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살해하고 스스로 술탄이 되었다.[36]

맘루크 왕조의 실질적인 건설자 바이바르스는 훌레구가 세운 일 칸국과 시리아에 남아있던 십자군 국가의 잔여 세력과 싸웠고, 1277년 사망할 때까지 맘루크 왕조의 영토를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확장했다.

3. 2. 초기 역사 (바흐리 왕조)

아이유브 술탄국의 술탄 살리흐가 죽자 그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가 통치하였다. 샤자르 알두르는 아랍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통치자로, 맘루크 총사령관 아이바크와 재혼하여 이집트 일대를 함께 통치하며 맘루크 술탄국을 시작하였다.[33] 여성 술탄에 대한 맘루크 이외 무슬림들의 저항이 거세, 샤자르 알두르는 같은 해 바흐리야의 최고 실력자인 아이바크와 재혼하고 술탄 자리를 양위했다.[34] 이후 맘루크 출신들이 이집트 술탄이 되면서 샤자르 알두르 또는 아이바크를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으로 여기게 되었다.

맘루크들은 9세기부터 시리아와 이집트의 군사 조직 일부였으며, 툴루니드 왕조와 이크시디드 왕조처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통치 왕조가 되었다. 12세기 후반과 13세기 초 아이유브 통치하 이집트 군대의 중추는 맘루크 연대였으며, 살라딘 치하에서 시작되어 파티마 칼리파의 흑인 아프리카 보병을 대체했다. 각 아이유브 술탄과 고위 에미르는 사적인 맘루크 부대를 보유했다. 아이유브에 봉사한 맘루크 대부분은 킵차크계 중앙아시아 출신 킵차크 투르크였으며,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랍어를 배웠다. 맘루크들은 '아버지'라 부르는 주인에게 헌신적이었고, 노예보다는 친족처럼 대우받았다.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알-카밀 부재 중 이집트 총독으로 재직하며 1229년까지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에서 약 1,000명의 맘루크를 확보했고, 이들은 '살리히야'(단수 '살리히')로 불렸다.

알-살리흐는 1240년 이집트 술탄이 되어 많은 맘루크를 해방, 승진시키고 전임자 에미르들에게서 몰수한 봉토를 통해 지원했다. 그는 이집트에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준군사 조직을 만들었고, 당시 사람들은 이집트를 "살리히가 지배하는" 곳으로 여겼다.

1249년 제7차 십자군 기간 중 프랑스 루이 9세 군대가 다미에타를 점령하며 알-살리흐와 맘루크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알-살리흐는 다미에타 철수에 반대하고 주둔군 처벌을 위협, 알만수라 주둔군 반란을 야기했고, 군사 사령관 팍르 아드-딘 이븐 셰이크 알-슈유크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십자군 진격 중 알-살리흐가 사망하고 메소포타미아계 아들 알-무아잠 투란샤가 계승했다. 샐리히야는 계승을 환영했지만, 투란샤는 자지라와 시리아 출신 쿠르드족 친위대를 등용해 지배력에 도전하는 대항마로 삼았다.

1250년 2월 11일, 바이바르스 지휘 하 샐리히야 하급 연대 바흐리 맘루크는 알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했다. 2월 27일, 투란샤는 이집트 군대를 이끌고 알-만수라에 도착, 4월 5일 십자군은 알-만수라 맞은편 진지를 철수했다. 이집트군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4월 6일 십자군을 궤멸, 루이 9세와 소수 귀족을 포로로 잡아 제7차 십자군을 종식시켰다. 투란샤는 '무아자미야'로 알려진 수행원과 맘루크들을 샐리히야를 희생시키며 권력에 배치했고, 1250년 5월 2일 불만을 품은 샐리히야 아미르들이 파리스쿠르에서 투란샤를 암살했다.

이후 샐리히야 주도 선거단은 아유브 왕조 아미르 중 투란샤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소집, 다마스쿠스의 안-나시르 유수프와 알-카락의 알-무기스 우마르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알-살리흐 미망인 샤자르 알-두르가 만장일치로 선출, 샐리히야 반군 엘리트 지배를 확보하고 후원과 혈연 관계를 시작했다. 잠다리와 바흐리 부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크타 등 특권을 분배했다. 샐리히 맘루크이자 아타베그 알-아스카르인 아이바크가 군대와 바흐리야, 잠다리야에 의해 권력 독점이 거부되며 아유브 왕조 유지를 선호함이 분명해졌고, 술탄 권위가 아유브 왕조에만 속한다고 주장했다. 바흐리야는 아이백이 알-아슈라프 무사와 권력을 공유하도록 강요했다.

아이백은 바흐리와 잠다리 아미르들의 주요 보루였고, 아타베그 알-아스카르 승진으로 카이로에서 바흐리 폭동이 발생, 샐리히 내부 충돌 중 첫 번째였다. 바흐리야와 잠다리야는 투란샤 암살 주동자이자 샤자르 알-두르에게 팍르 아드-딘 대규모 토지를 받은 파리스 알-딘 악타이로 대표되었고, 악타이를 아이백 대항마로 여겼다. 아이백은 1251년 로다 본부 폐쇄, 1254년 악타이 암살로 바흐리야에 대항했다.

이후 아이백은 수행원과 샐리히야 반체제 인사를 제거, 바흐리 맘루크 일시 탈출을 야기, 가자에 정착했다. 장교 부족으로 악타이는 이집트 군대와 시리아 출신 투르크계 나시리와 아지지 맘루크 중 새 지지자를 모집, 안-나시르 유수프를 배신하고 1250년 이집트로 이주했다. 아이백은 시리아 맘루크 후원자 자말 아드-딘 아이두그디 야망이 커지자 위협을 느꼈고, 아이두그디가 안-나시르 유수프를 술탄으로 임명하려는 음모를 알고 1254년 또는 1255년 알렉산드리아에 투옥했다.

1257년 4월 10일 아이바크는 암살당했고, 샤자르 알-두르 명령으로 보인다. 그녀는 일주일 후 암살당했다. 이집트에 권력 공백이 생겨 아이백 십 대 아들 알-만수르 알리가 술탄 상속인이 되었고, 아이백 측근 쿠투즈가 실권자였다. 바흐리야와 알-무기스 우마르는 1257년 11월과 1258년 이집트 정복 시도를 했지만 패했다. 다마스쿠스 안-나시르 유수프를 공격, 예리코에서 물리쳤다. 안-나시르 유수프는 알-카락에서 알-무기스와 바흐리야를 포위했지만, 몽골 제국 침략 위협에 아유브 왕조 아미르들은 화해, 바이바르스는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투항했다. 쿠투즈는 1259년 알리를 폐위, 잠재적 반대 세력 제거를 위해 이집트 무이지야와 남은 바흐리 맘루크를 제거, 체포했다. 생존 무이지와 바흐리 맘루크는 가자로 갔고, 바이바르스는 쿠투즈 반대 그림자 국가를 세웠다.

창을 든 기병들. 아마드 알-미스리("이집트인")의 ''니하야트 알-술''(기마술 설명서), 1371년, 맘루크 이집트 또는 시리아.


맘루크 세력들이 이집트와 시리아 지배권을 놓고 싸우는 동안, 훌라구 칸 지휘 몽골군은 1258년 이슬람 세계 지적, 정신적 중심지 바그다드를 함락, 서쪽으로 진격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쿠투즈는 시리아 이전 적 안-나시르 유수프에게 군사 증원을 보냈고, 몽골 위협에 바이바르스 포함 바흐리야와 화해했다. 훌라구는 카이로 쿠투즈에게 사절을 보내 몽골 지배 복종을 요구했지만, 쿠투즈는 사절을 죽여 "몽골 왕좌에 대한 최악의 모욕"을 했다. 훌라구 철수 소식에 쿠투즈와 바이바르스는 시리아 정복을 위해 12만 군대를 동원했다.

맘루크들은 팔레스타인에 진입, 1260년 9월 나사렛 남쪽 평원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 지휘 훌라구 잔류 몽골군과 대치, 몽골군 패배와 키트부카 처형으로 끝났다. 맘루크들은 몽골군 점령 다마스쿠스와 시리아 도시를 탈환했다. 쿠투즈 카이로 개선 귀환 중 바흐리 음모로 암살당했고, 바이바르스가 1260년 10월 권력을 장악, 바흐리 통치를 시작했다.

5대 술탄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술탄국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바스 칼리파국 마지막 칼리파 친척을 카이로에서 보호, 칼리파로 추대,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 시대를 시작, 1517년 맘루크 술탄국 멸망까지 명맥을 이었다. "허수아비 칼리파조" 시대가 시작, 맘루크는 노예였고 노예 해방 권리는 칼리파에게만 부여, 칼리파는 술탄 권력 정당성을 인정하는 자로 전락했다.

아이바크 이후 맘루크 왕조 전기는 바이바르스 포함 아이유브 왕조 사리프 설립 바흐리야 출신이 차지, 이 시기 맘루크 왕조는 바흐리 맘루크 왕조로 불린다.

바이바르스 사후, 바라카, 살라미시가 술탄이 되어 바이바르스가 술탄 지위 세습을 시도했으나, 바이바르스 동료이자 바흐리야 제1인자 칼라운에 의해 폐위, 1279년 칼라운이 술탄이 되었다.

3. 3. 부르지 왕조 시대

1382년, 바르쿠크는 칼라운 가문의 술탄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43] 바르쿠크는 체르케스인을 중심으로 한 부르지 군단 출신의 맘루크였으며, 바르쿠크 이후 맘루크 왕조의 중심이 되는 맘루크가 기존의 바흐리 맘루크에서 부르지 맘루크로 바뀌었다.

부르지 맘루크 왕조에서는 술탄의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술탄은 유력 아미르들 사이에서 상호 선출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 제도 때문에 아미르들은 술탄 후보가 될 유력 아미르 휘하에서 군벌을 형성했고, 군벌 간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맘루크들 간의 내분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15세기에는 흑사병 유행을 계기로 카이로의 번영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고, 맘루크 왕조를 떠받쳤던 이집트의 경제도 점차 쇠퇴해갔다. 16세기 초에는 인도양 무역에 포르투갈인이 참여했고, 1509년에는 맘루크 왕조의 해군이 인도 디우 해전에서 프란시스쿠 데 알메이다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에 패배했다.[44] 육상에서는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오스만-마므루크 전쟁 (1516년-1517년)), 1516년 북시리아 알레포 북부에서 벌어진 마르주 다비크 전투에서 셀림 1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에게 대패했다.[45] 이듬해, 셀림 1세는 카이로를 정복했고(리다니야 전투)[46], 맘루크 왕조는 멸망했다.

3. 4. 오스만 제국 치하의 맘루크

오스만 제국의 정복으로 맘루크 술탄국은 멸망했지만, 맘루크는 군사·사회 계급으로서 계속 존재했다.[26] 이들은 오스만 통치하에서도 정치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자기 재생산적인, 주로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사 계급"을 구성했다.[27] 맘루크는 예니체리, 아자브(عَزَب, azab)와 같은 오스만 정규군과 병행하여 군사 부대로 존재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과 이집트 맘루크 연대 간의 차이는 혼혈이 일반화되면서 모호해져 더욱 혼합된 사회 계급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맘루크 '가문'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진정한 맘루크와 아울라드 알나스(أولاد الناس|아울라드 알나스ar)를 포함한 복잡한 구성원으로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각 가문은 우스타즈(أُسْتَاذ|우스타즈ar)가 이끌었는데, 오스만 장교 또는 지역 민간인일 수 있었다. 이들의 후원은 다른 오스만 주에서 모집된 수하와 지역 도시 인구 및 부족들 간의 동맹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17세기 초까지 이집트 맘루크의 대다수는 여전히 코카서스 또는 체르케스 출신이었지만,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보스니아와 조지아와 같이 오스만 제국 또는 그 국경의 다른 지역 출신의 맘루크들이 이집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스만 시대 내내 강력한 맘루크 가문과 파벌은 중요한 정치 직책과 이집트의 수입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했다. 1688년부터 1755년까지 베두인 및 오스만 주둔군 내 파벌과 동맹을 맺은 맘루크 베이(bey)들은 최소 34명의 주지사를 축출했다. 맘루크는 1811년 무함마드 알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제거될 때까지 이집트 정치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남았다.

4. 정치

맘루크 술탄국 초기에는 바흐리 왕조(1250년-1390년)가 통치했는데, 이들은 투르크 및 몽골족 출신의 맘루크였다. 이후 부르지 왕조(1382년-1517년)가 통치했는데, 이들은 카프카스 지방 출신이었다.[48]

맘루크 술탄은 세습되지 않았고 맘루크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비아랍계 외래인이었다. 바이바르스는 압바스 왕조의 후예(무스탕시르 2세)를 카이로에서 명목상 칼리프로 세웠다.[47] 칼리프와 술탄의 관계는 일본사에서 천황과 정이대장군의 관계나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에 비유되기도 한다. 또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보호자로서 이슬람 관습에 따른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보장하여 당시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었다.

1289년 트리폴리 공성전. 칼라운이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했다.


1281년 일칸국은 시리아를 공격했다. 맘루크 군은 일칸-아르메니아-조지아-셀주크 연합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홈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시리아 지배를 확고히 했다. 칼라운은 1285년 마르가트 요새를 함락했다.

칼라운은 상인 계급, 무슬림 관료 및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불법 세금을 없애고, 예언자 모스크, 알아크사 모스크, 이브라히미 모스크 등 이슬람 성지에 대한 건축 및 보수 공사를 했다. 이후 카이로에 병원 단지를 건설했다. 일칸국과의 긴장 완화 후, 칼라운은 내부 반대를 억압하고 체르케스인을 포함한 비투르크계 맘루크를 구입하여 부르지야 연대를 편성했다.

카이로에 있는 술탄 칼라운 묘 내부 (1284~1285)


칼라운 사후 아들 알아슈라프 칼릴은 혈통을 강조하며 정통성을 얻었다. 칼릴은 국가 기구를 조직하고, 십자군과 몽골을 물리치고, 시리아를 통합하고, 맘루크와 무기를 유입시켰다. 1291년 아크르를 함락하여 시리아 전역으로 지배를 확장했다.

맘루크들은 아유브 왕조의 행정, 법률, 경제 시스템을 유지했다. 이집트, 시리아, 헤자즈를 통치했으며, 맘루크 국가는 단일체였다. 카이로는 수도이자 사회, 경제, 행정 중심지였고, 카이로 요새는 술탄의 본부였다.

아유브 왕조부터 바흐리 맘루크 왕조는 튀르크계 유목민, 몽골인, 쿠르드인이 중심이었고, 부르지 맘루크 왕조부터는 체르케스인 등 북카프카스 출신이 많았다. 노예 상인에게 이집트로 끌려온 이들은 술탄이나 아미르에게 매입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다.[48] 해방 후 맘루크 군단에 편입되었고, 능력에 따라 승진하여[49] 궁정 관직이나 지방 총독직을 맡았다. 주종 관계와 동문 의식을 통해 결속을 다졌고, 술탄은 동문 맘루크들의 제일인자였다.

중앙 정부는 술탄과 군사 계급 출신 관료들로 구성되었다. 술탄은 법령 발행, 전쟁 결정, 세금 부과, 식량 분배, 범죄자 처벌 등의 책임을 맡았다.[47] 맘루크들은 이슬람 수호자임을 내세웠고, 바이바르스부터 칼리프로부터 집행권을 인정받았다.[47]

지방 행정은 니야바(niyabah) 단위로 구성되었고, 술탄이 임명한 나이브(na'ib)가 다스렸다. 나이브는 행정, 사법, 군사, 재정 권한을 위임받아 술탄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베두인 부족은 맘루크 군대의 예비군이자 기병대에 필요한 아라비아 말 공급원이었다. 알나시르 무하마드는 알 파들(Al Fadl) 부족에게 이크타(iqtaʿat, 토지)를 부여하여 시리아 사막에서 강력한 부족으로 성장시켰다.[21]

4. 1. 술탄

맘루크 술탄은 최고 통치 권력자였으며, 술탄 부관(na'ib al-saltanaar)으로 알려진 지방 총독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47] 새로운 술탄이 등극할 때마다 일관된 등극 절차가 있었다. 대부분 에미르와 맘루크 평의회(그들은 충성 맹세를 할 것이다)에 의한 선거, 술탄의 왕위 칭호인 al-malikar 취임, 술탄이 이끄는 카이로를 통한 국가 주도의 행렬, 그리고 술탄의 이름이 쿠트바ar(금요일 기도 설교)에서 읽히는 것을 포함했다.[47] 이 과정은 공식화되지 않았고 선출 기관은 정의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맘루크 파벌이 지배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에미르와 맘루크로 구성되었다. 경쟁 파벌에 의한 왕위 찬탈은 비교적 흔했다.[47] 등극의 선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왕조 계승은 때때로 현실이 되었다.[47] 특히 바흐리 시대에는 바이바르스의 아들 바라카와 솔라미시가 그를 계승했고, 그 후 칼라운이 왕위를 찬탈하여 때때로 중단이 있었지만, 그 후 4대에 걸쳐 직계 후손들이 계승했다.[47] 부르지 시대에는 세습 통치가 훨씬 덜 빈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부르지 술탄들은 모두 혈연이나 맘루크 관계를 통해 체제의 창시자 바르쿠크와 관련이 있었다.[47] 술탄직에 혈족이 등극하는 것은 종종 주요 맘루크 에미르들의 결정이나 우유부단함 또는 전임 술탄의 의지의 결과였다.[47]

하위 에미르들은 술탄을 최고 권위를 맡긴 동료이자 봉급과 군사적 독점을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후원자로 여겼다. 에미르들이 술탄이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파괴적인 폭동, 쿠데타, 또는 복무 요청 지연이 모두 가능한 시나리오였다.[47] 종종 술탄의 권력에 대한 실질적인 제약은 자신의 khushdashiyyaar에서 비롯되었다.[47] 맘루크 조직과 파벌 통합의 기초는 khushdashiyyaar의 원칙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술탄의 권위와 권력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47]

술탄의 책임에는 특정 법령과 일반 규칙의 발행 및 시행, 전쟁에 나설 결정, 군사 작전을 위한 세금 부과, 제국 전역에 걸쳐 식량 공급의 비례적 분배 보장,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혐의를 받는 범죄자들의 조사 및 처벌 감독이 포함되었다. 술탄 또는 그의 임명자는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서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 행렬을 아미르 알하즈ar(순례자 행렬 사령관)의 자격으로 이끌었다. 칼라운부터 시작하여 술탄들은 매년 카바에 걸리는 키스와ar(덮개)를 독점적으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돔 오브 더 락을 후원했다.[47]

맘루크들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의 수호자임을 내세웠고, 바이바르스부터 칼리프로부터 자신들의 집행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압바스 칼리파에 충성했지만, 1258년 몽골이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칼리프 알 무스타심을 죽이면서 압바스 칼리파는 멸망했다. 3년 후, 바이바르스는 압바스 왕조의 일원인 알 무스탄시르를 칼리프로 삼아 칼리프 제도를 재건했고, 알 무스탄시르는 바이바르스를 술탄으로 인정했다.[47] 칼리프는 이집트, 시리아, 자지라, 디야르바크르, 헤자즈, 예멘, 그리고 십자군이나 몽골로부터 정복한 모든 영토에 대한 술탄의 권위를 인정했다.[47] 알 무스탄시르의 후임 압바스 칼리프들은 공식적으로 칼리프직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47]

맘루크 왕조의 술탄은 세습되지 않았고 맘루크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배하던 이집트에서는 비아랍계 외래자였다. 그 때문에 바이바르스 시대에 압바스 왕조의 후예(무스탕시르 2세)를 수도 카이로에서 명목상의 칼리프로 세웠다.[47] 또한 이슬람의 3대 성지인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보호자로서 이슬람 관습에 따른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보장하여 당시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었다.

4. 2. 중앙 정부

맘루크 술탄국의 술탄은 군사 계급 출신이었으며, 이 계급은 주로 맘루크(노예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Awlad al-nasar (맘루크의 자손)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군 복무보다는 상업, 학문 등 민간 분야에 종사했다.

바이바르스는 군대를 왕실 맘루크 연대, 에미르(지휘관)의 병사들, halqaar (비 맘루크 병사)의 세 부분으로 재편성했다. 왕실 맘루크는 술탄 직속의 최정예 부대였으며, 에미르들은 자신의 부대를 보유하고 술탄의 명령에 따라 동원되었다. halqaar는 맘루크 연대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고, 14세기에 쇠퇴했다.

바이바르스는 에미르의 계급을 10, 40, 100으로 나누는 명확한 계급 제도를 만들었다. 각 숫자는 에미르가 지휘하는 맘루크의 수를 나타냈다. 또한, 에미르의 계급과 iqtaʿar (토지) 규모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을 만들었다.

맘루크들은 아유브 왕조 시대의 ustadarar (집사장), hajibar (숙직관), amir jandarar (무기고 사령관), khazindarar (재무관) 직책을 유지하면서, dawadarar (서기관), amir akhurar (왕실 마구간 사령관), ru'us al-nawabar (맘루크 부대장), amir majlisar (청중 사령관) 등의 직책을 추가했다.

ustadarar (ustadh al-darar에서 유래, '집의 주인'이라는 뜻)는 술탄의 참모장으로서 왕실 업무, 예산, 카이로 요새를 관리했다. ustadarar는 종종 ustadar al-aliyaar (대집사장)라고 불렸으며, 14세기 후반에는 국가 최고 재정 책임자가 되었다.

4. 3. 지방 행정

맘루크 술탄국의 지방 행정은 니야바(niyabah)라는 단위로 구성되었고, 각 니야바는 술탄이 임명한 총독인 나이브(na'ib)가 다스렸다. 나이브는 해당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 재정 등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사실상 술탄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했다.

맘루크 술탄국은 베두인 부족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베두인 부족은 맘루크 군대의 예비군 역할을 했고, 특히 기병대에 필요한 아라비아 말을 공급하는 주요 공급원이었다. 칼라운 술탄은 바르카(Barqa)의 베두인족으로부터 질 좋은 말을 저렴하게 구입했고, 알나시르 무하마드 술탄은 바르카, 시리아, 이라크, 바레인(동부 아라비아)의 베두인족으로부터 말을 사들이는 데 막대한 돈을 썼다.[21]

초기에는 베두인 족장들에게 이크타(iqtaʿat, 토지)를 부여하는 것을 꺼렸으나, 알나시르 무하마드 술탄의 통치 기간에는 알 파들(Al Fadl) 부족에게 풍부하고 질 좋은 이크타를 부여하여 그들이 시리아 사막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베두인 부족이 일칸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21] 그러나 이크타와 아미르 알 아랍(amir al-ʿarab, 베두인족의 최고 사령관) 직위를 둘러싼 경쟁은 부족 간 갈등과 반란을 야기했고, 알나시르 무하마드 사후 시리아에서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흑사병으로 약화된 맘루크 지도부는 베두인 부족장들을 암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알 파들 부족은 결국 권력을 잃고 알 카락(al-Karak) 주변의 베두인 부족들이 득세하게 되었다.[21]

이집트에서도 맘루크 술탄국은 베두인 부족과 비슷한 관계를 맺었다. 이사 이븐 하산 알하잔(Isa Ibn Hasan al-Hajjan) 부족은 대규모 이크타를 할당받아 강력해졌으나, 이후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1353년 부족장이 처형되었다. 하부 이집트의 샤르키야(Al Sharqia Governorate)에서는 타알라바(Tha'laba) 부족이 우편로 감독을 맡았지만 신뢰할 수 없었고, 알 아이드(Al A'id) 부족의 약탈에 가담하기도 했다. 상부 이집트에서는 아락(Arak)과 바누 힐랄(Banu Hilal) 부족이 사실상 통치자가 되어 맘루크 술탄국이 그들에게 세금 징수를 의존하게 되었다. 베두인 부족 간의 전쟁은 상부 이집트의 무역과 여행을 방해하고 경작지와 설탕 가공 공장을 파괴하기도 했다. 결국 1353년 샤이쿠(Shaykhu)의 원정으로 상부 이집트와 하부 이집트의 베두인 부족들은 숙청되었다.[21]

5. 군사

맘루크 군대는 술탄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였다. 술탄들은 군사 계급 제도의 산물이었으며, 그 진입은 본질적으로 맘루크에게 제한되었다.[45] 맘루크 군대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 왕실 맘루크: 술탄 직속 부대로, 군대 내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이들은 술탄의 사병 집단과 같았으며, 그 진입은 배타적이었다.[46]
  • 에미르 부대: 각 에미르(장군)들이 소유하고 유지하는 부대였다. 에미르들은 필요에 따라 술탄에 의해 동원되었으며,[46] 에미르가 승진함에 따라 부대 병사 수가 증가했다. 경쟁하는 에미르들이 서로의 권위에 도전할 때, 그들은 종종 자신의 병력을 사용하여 민간 생활에 큰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47]
  • 할카(halqa): 맘루크가 아닌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할카는 맘루크 연대보다 하급 지위를 가졌으며, 자체적인 행정 구조를 가지고 술탄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할카 연대는 14세기에 전문적인 비(非) 맘루크 병사들이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중단하면서 쇠퇴했다.[46]


바이바르스는 군대 내 통일성을 확립하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아유브 왕조 군대의 임시적인 성격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46] 그는 에미르 계급을 10, 40, 100으로 나누는 계급 제도를 만들었는데, 각각 에미르 지휘하에 배정된 맘루크 수를 나타냈다. 100명의 에미르는 전투 중에 추가로 1,000명의 기병을 배치받을 수 있었다.[46] 또한, 바이바르스는 술탄의 명령이 이행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2주마다 병사들을 검열하기 시작했고, 정기적인 검열을 통해 병사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배포했다.[46]

맘루크는 국가 내 행정직과 궁정직을 채우면서 아유브 왕조의 계급 제도에 대한 혁신을 점차적으로 발전시켰다. 아유브 왕조 시대에 존재했던 우스타다르(ustadar, 집사장), 하집(hajib, 숙직관), 아미르 잔다르(amir jandar, 무기고 사령관), 카진다르(khazindar, 재무관) 직책은 유지되었지만, 바이바르스는 다와다르(dawadar, 서기관 또는 고문), 아미르 아쿠르(amir akhur, 왕실 마구간 사령관), 루우스 알나왑(ru'us al-nawab, 맘루크 부대장), 아미르 마즐리스(amir majlis, 청중 사령관) 직책을 추가했다. 이러한 추가 직책은 대부분 의례적인 직책이었고 군사 계급 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47]

우스타다르(ustadar, 아랍어 우스타드 알다르ustadh al-dar에서 유래)는 술탄의 참모장으로서 왕실 궁정의 일상 업무를 조직하고, 술탄의 개인 예산을 관리하며, 카이로 요새의 모든 건물과 직원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48] 우스타다르는 종종 그의 하급 우스타다르 사기르(ustadar saghir, 하급 집사장)와 구별하기 위해 우스타다르 알리야(ustadar al-aliya, 대집사장)라고 불렸는데, 하급 집사장들은 술탄의 재무부, 사유 재산, 요새의 부엌과 같이 궁정과 요새의 특정 측면을 감독했다. 에미르들은 자신들의 우스타다르를 두었다.[48]

5. 1. 군사 제도

맘루크 군사 제도는 이크타(iqtaʿ) 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크타 제도는 아유브 왕조로부터 계승되어 맘루크 시대에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군사 봉사에 대한 대가로 국가로부터 토지 할당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48] 토지는 주기적인 토지 조사(rawk)를 통해 평가되었으며, 이를 통해 토지 구획, 품질, 연간 추정 세수, 법적 지위(와크프 또는 이크타) 등이 분류되었다.[49]

맘루크 군대의 핵심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 왕실 맘루크: 술탄 직속 부대로, 가장 강력하고 훈련 수준이 높았다.
  • 에미르 부대: 각 에미르(장교)들이 소유하고 유지하는 부대로, 에미르의 권력과 영향력에 따라 규모와 질이 달랐다.
  • 할카(halqa): 자유민으로 구성된 부대로, 맘루크에 비해 낮은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계급 제도는 이크타 제도와 연관되어, 왕실 맘루크와 에미르들은 이크타를 통해 수입을 얻고 자신의 부대를 유지했다. 할카는 특정 지역(주로 레바논 산맥)에서 세습 이크타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맘루크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맘루크 군대는 기병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뛰어난 기마술과 전투 기술을 보유했다. 특히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제국 군대를 격파하여 그 명성을 떨쳤다.

맘루크들은 화약 무기 도입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여 화약 무기의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이는 훗날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5. 2. 주요 군사 활동

맘루크 술탄국은 십자군, 몽골, 오스만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중요한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십자군과의 전쟁1249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침공하여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술탄 알-살리흐는 다미에타 철수에 반대했지만, 십자군의 진격 중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알-무아잠 투란샤가 술탄직을 계승했으나, 1250년 2월,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맘루크 부대가 알만수라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했다. 이후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십자군은 궤멸되었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히면서 십자군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몽골과의 전쟁1258년,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알레포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맘루크 술탄 쿠투즈바이바르스를 포함한 이전의 적들과 연합하여 몽골의 위협에 맞섰다. 1260년 9월,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는 몽골군을 격파하고 키트부카를 처형했다. 이 승리로 맘루크는 시리아 지역을 탈환하고 몽골의 서진을 저지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사파비 왕조와 둘카디르를 격파하고 맘루크 술탄국을 공격했다. 1516년 8월, 마르지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맘루크 군대를 격파하고 술탄 알-구리를 전사시켰다. 이 전투에서 알레포 총독 카이르 바크의 배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시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맘루크 술탄국은 1517년까지 존속했지만, 셀림 1세는 리다니야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를 다시 격파하고 카이로를 점령했다. 마지막 술탄 투만 베이는 기자 근처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이로써 맘루크 술탄국은 멸망하고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 경제

맘루크 시대의 경제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술탄을 중심으로 하는 카스트 정부가 통제하는 국가 경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역 주민들과 관련된 자유 시장 경제였다.[28] 맘루크들은 카이로에 국가 관료 조직을 구축하고 군사 계급과 관련된 iqtaʿ|이크타ar 시스템을 통해 경제를 중앙 집중화했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이 이러한 중앙 집중화를 도왔다.[28]

맘루크들은 아이유브 왕조와 같은 통화 시스템을 사용했는데, 금 디나르, 은 디르함, 구리 팔루스로 구성되었다.[28] 잦은 통화 정책 변경으로 인해 통화 시스템은 매우 불안정했고, 구리 주화 유통량 증가와 디르함에 사용되는 구리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도 했다.[28]

시장을 감독하기 위해 히스바ar라는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고, 무흐타시브ar(감찰관)가 담당하였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알푸스타트, 하이집트에 4명의 무흐타시브ar가 있었으며, 카이로의 무흐타시브ar가 가장 중요했다. 무흐타시브ar는 무게와 측정 단위, 상품의 품질을 검사하고, 합법적인 무역을 유지하며, 바가지 요금을 적발하는 역할을 했다.[28] 초기에는 카디ar 또는 무슬림 학자가 이 직책을 맡았지만, 15세기에는 맘루크 에미르들이 무흐타시브ar로 임명되기 시작했다.[30]





15세기까지 맘루크 세력 다툼, 전염병, 베두인 부족의 침범 등으로 재정 위기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맘루크는 도시 중산층에 대한 과세, 유럽으로의 면화와 설탕 생산 및 판매 증대, 유럽과 극동 간 무역 중개 이익 창출이라는 세 가지 방식을 적용했다. 특히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 무역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바르스바이는 향신료 등 사치품에 대한 국가 독점을 설립하여 가격을 설정하고 이익의 일정 비율을 징수했다. 1387년 알렉산드리아를 직접 통제하고 세수를 개인 재무부로 이전했으며, 1429년에는 카이로를 통한 유럽 향신료 무역을 명령했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포르투갈 제국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진출은 맘루크-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중해 무역 독점 수입을 크게 감소시켜 술탄국의 몰락에 기여했다.

6. 1. 농업

맘루크 시대 경제에서 농업은 주요 수입원이었다.[29] 농산물은 맘루크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주요 수출품이었다.[29] 설탕과 섬유 생산과 같은 주요 산업은 사탕수수와 목화와 같은 농작물에 의존했다.[29] 모든 농산물은 국가에 의해 과세되었으며, 술탄의 국고가 가장 큰 수입을 차지했고, 그 다음으로 에미르(Amir)와 주요 민간 중개상들이 있었다. 에미르의 주요 수입원은 그의 이크타(iqtaʿ)의 농산물이었다.[29]

이집트에서 맘루크의 농업 생산 중앙 집중화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보다 더 철저했다. 이집트의 모든 농업은 나일강이라는 단일 관개원에 의존했고, 관개에 대한 측정과 권리는 나일강의 홍수에 의해 결정되었던 반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주로 빗물 관개라는 여러 원천이 있었고, 측정과 권리는 지역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중앙 집중화는 이 지역의 지리적 다양성과 빈번한 침략으로 인해 이집트보다 더 복잡했다.[29] 시리아-팔레스타인 농업에서 국가의 역할은 재정 행정과 관개 시설 및 기타 농촌 인프라에 국한되었다.[29] 중앙 집중화 정도가 이집트만큼 높지는 않았지만, 맘루크는 시리아 경제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행사하여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시리아에서 맘루크 군대의 유지는 시리아 농업 수입에 대한 국가 통제에 의존했다.[29]

맘루크 지방 또는 지역 총독의 책임 중에는 농업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버려진 지역을 재개발하고, 베두인족의 습격으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고, 불모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기존 관개 시설의 유지 및 확장을 통해 가능)과 경작 가능한 저지대 지역 경작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있었다.[29] 농업 활동을 방해하거나 농작물과 농업 인프라를 손상시켜 수입을 감소시키는 베두인족의 습격으로 인해 농촌 생활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맘루크는 베두인족의 무장을 막고 기존 무기를 압수하려고 시도했다.[29]

6. 2. 무역

맘루크 시대의 이집트와 시리아는 중세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중계 역할을 수행했다.[30] 초기 맘루크 술탄인 바이바르스제노바와 통상 조약을 체결했고, 칼라운은 실론과 유사한 협정을 맺는 등, 제국은 외국 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30]

15세기까지 맘루크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한 혼란, 전염병으로 인한 이크타 수입 감소, 베두인 부족이 방치된 농지를 침범하는 등의 문제로 술탄국은 재정 위기를 겪었다.[30] 이러한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맘루크는 도시 중산층에 대한 과세, 유럽으로의 면화와 설탕 생산 및 판매 증대, 유럽과 극동 간 무역에서의 중개 위치를 통한 이익 창출이라는 세 가지 방식을 적용했다. 이 중 유럽과 극동 간 무역 중개를 통한 이익 창출은 맘루크의 가장 수익성이 높은 정책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카탈루냐 공국 바르셀로나와의 무역 관계를 강화하고 상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30] 이 시기에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오랜 무역은 맘루크가 제국의 항구에서 영업하거나 통과하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30]

맘루크 이집트는 주요 섬유 생산국이었으며 서유럽에 대한 원자재 공급국이었다.[30] 흑사병의 빈번한 발생은 섬유, 비단 제품, 설탕, 유리, 비누, 종이의 생산 감소로 이어졌지만, 유럽인들의 이러한 상품 생산 증가와 맞물려 무역은 계속되었다. 지중해 무역은 후추, 육두구와 꽃, 정향, 계피와 같은 향신료뿐만 아니라 약재와 인디고가 지배했다.[30] 이러한 상품들은 페르시아, 중세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하여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항구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러한 항구에는 유럽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유럽 상인들은 금과 은 두캇과 금괴, 비단, 모직과 리넨 직물, 모피, 밀랍, 꿀, 치즈를 판매했다.[30]

바르스바이 통치하에 향신료와 같은 사치품에 대한 국가 독점이 설립되어 국가가 가격을 설정하고 이익의 일정 비율을 징수했다.[30] 1387년 바르스바이는 이집트의 주요 상업 항구인 알렉산드리아를 직접 통제했다. 1429년 그는 홍해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신료를 직접 운송하는 것을 금지하고, 카이로를 통해 유럽으로의 향신료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했다.[30]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포르투갈 제국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진출은 지중해 무역에 대한 맘루크-베네치아 독점의 수입을 크게 감소시켰다.[30] 1498년, 포르투갈 항해사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착하여 중동을 우회하는 유럽과 동아시아 간 무역의 새로운 경로를 열었다. 이는 당시 이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던 무슬림 상업과 인도양에서 지중해로 맘루크 영토를 통과하는 무역에 의존했던 베네치아의 번영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10년 이상 동안, 일련의 충돌이 인도양의 포르투갈군과 그들에 대항하여 파견된 무슬림 원정대 사이에서 발생했다. 50척의 맘루크 함대가 구자라트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1506년 제다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1507년 차울 해전에서 포르투갈을 패배시켰지만 1509년 디우 해전에서 패배했다. 1515년, 살만 라이즈의 지휘 아래 오스만-맘루크 연합 함대가 출격했지만, 궁극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술탄국의 몰락과 일치하고 기여했다.

6. 3. 산업

맘루크 시대의 경제는 크게 술탄 중심의 카스트 정부가 통제하는 국가 경제와 자유 시장 경제, 두 영역으로 나뉘었다. 맘루크들은 카이로에 관료 조직을 구축하고 군사 계급과 관련된 iqtaʿ|이크타ar 시스템을 통해 경제를 중앙 집중화했다. 이집트에서는 나일 강이 이러한 중앙 집중화를 도왔다. 맘루크들은 금 디나르, 은 디르함, 구리 팔루스로 구성된 아이유브 왕조와 같은 통화 시스템을 사용했다. 그러나 잦은 통화 정책 변경으로 인해 통화 시스템은 매우 불안정했고, 구리 주화 유통량 증가와 디르함에 사용되는 구리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도 했다.[28]

시장을 감독하기 위해 히스바ar라는 행정 기구가 설치되었고, 무흐타시브ar(감찰관)가 담당하였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알푸스타트, 하이집트에 4명의 무흐타시브ar가 있었으며, 카이로의 무흐타시브ar가 가장 중요했다. 무흐타시브는 무게와 측정 단위, 상품의 품질을 검사하고, 합법적인 무역을 유지하며, 바가지 요금을 적발하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카디ar 또는 무슬림 학자가 이 직책을 맡았지만, 15세기에는 맘루크 에미르들이 무흐타시브ar로 임명되기 시작했다.[30]

이집트와 시리아는 중세 시대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중계 역할을 했다. 맘루크 왕조 초기, 바이바르스는 제노바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칼라운은 실론과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는 등 외국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확대했다. 15세기에는 내부 혼란, 전염병, 베두인 부족의 침범 등으로 재정 위기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맘루크는 도시 중산층에 대한 과세, 면화와 설탕 생산 및 판매 증대, 유럽과 극동 간 무역에서의 중개 위치를 통한 이익 창출이라는 세 가지 방식을 적용했다. 특히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오랜 무역은 맘루크가 상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맘루크 이집트는 주요 섬유 생산국이었으며 서유럽에 대한 원자재 공급국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섬유, 비단 제품, 설탕, 유리, 비누, 종이 생산이 감소했지만, 유럽인들의 생산 증가와 함께 무역은 계속되었다. 지중해 무역은 후추, 육두구, 정향, 계피와 같은 향신료와 약재, 인디고가 주를 이루었으며, 페르시아, 중세 인도,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하여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항구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유럽 상인들은 금과 은 두캇, 금괴, 비단, 모직, 리넨 직물, 모피, 밀랍, 꿀, 치즈를 판매했다.

바르스바이 통치하에는 향신료와 같은 사치품에 대한 국가 독점이 설립되어 국가가 가격을 설정하고 이익의 일정 비율을 징수했다. 1387년 바르스바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직접 통제하고 세수를 그의 개인 재무부로 이전했다. 1429년에는 카이로를 통해 유럽으로 향신료 무역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했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진출은 맘루크-베네치아의 지중해 무역 독점 수입을 크게 감소시켰고, 이는 술탄국의 몰락에 영향을 주었다.

7. 사회

맘루크 술탄국 시대에는 아랍어가 이미 종교, 문화, 관료제의 언어로 자리 잡았고, 비무슬림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아랍어가 널리 사용된 것은 지배 계층과 학자 계층의 언어를 배우려는 열망과 아랍 부족의 이집트 이주, 아랍인과 토착민 간의 혼인 때문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몽골과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집트와 시리아에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을 위한 무슬림 안식처를 만들어 아랍어 확산에 기여했다. 몽골 군대의 시리아 침입으로 학자와 장인을 포함한 시리아 이민자들이 이집트로 유입되었다.

1334년 아마드 이븐 카말 이븐 야히야 알 안사리 알 무타타비브가 필사한 꾸란의 끝부분. 이집트 국립 도서관의 마므루크 꾸란 필사본 소장품의 일부이다.


1282/1283년 제작된 콥트 문자로 표기된 마므루크 시대 천구의. 마므루크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콥트력을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터키와 이슬람 예술 박물관 소장.


초기 맘루크 시대 이집트에서는 수니파 이슬람, 주요 마즈하브(법학 학교), 다양한 수피 수행단체, 이스마일파 시아파 무슬림, 콥트 정교회 기독교인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는 파티마 왕조의 종교적 관용 정책에 맞서 수니파 이슬람 부흥을 추진했고, 바흐리 술탄들은 이를 더욱 강화했다. 맘루크들은 이슬람을 통해 피지배층과의 통합을 추구했으며, 십자군과 몽골에 맞서는 주요 이슬람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했다.

맘루크들은 무슬림 지도자들을 활용하여 종교적 감정을 통제했다. 바이바르스샤피이 마즈하브를 선호하던 전통을 깨고 네 개의 주요 수니파 마즈하브(샤피이, 말리키, 한발리, 하나피)에서 카디 알 쿠다(최고 판사)를 임명하여 다양한 무슬림 인구를 수용하고 각 마즈하브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샤피이 학자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맘루크들은 제국 내 수피 수행단체를 수용했다. 13세기 이집트에서 샤드힐리야가 가장 인기 있었으며, 유연한 종교 사상으로 현지에 쉽게 적응했다. 리파이야, 바다위야 등 다른 수피 수행단체도 많은 추종자를 가졌다. 맘루크들은 수피 수도원(자위야)에 자금을 지원하며 수피들을 후원했다. 한발리 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엄격한 도덕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조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제국 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은 각자의 종교 기관과 술탄의 권위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은 딤미(보호받는 사람들) 지위를 부여받았고, 지즈야(비무슬림에 대한 인두세)를 납부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몽골과의 연관성 때문에 반기독교 정서에 직면했다. 민중의 반기독교 적대감은 콥트인들이 관료제 내에서 차지했던 특권적 지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바흐리 술탄 시대에 콥트인 감소가 발생했고, 부르지 정권 하에서 가속화되었다. 콥트인들은 대중적 압력으로 인해 관료제에서 여러 차례 해고되었고, 1301년에는 모든 교회 폐쇄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많은 콥트인들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이슬람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했다. 14세기에는 박해, 교회 파괴, 콥트인들의 대규모 개종이 일어났다., 맘루크 시대 말까지 이집트의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비율은 10:1로 증가했을 수 있다.

시리아에서는 맘루크들이 유럽 세력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해안 지역에서 마론파그리스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몰아냈다. 마론파 교회는 로마 교황청 및 유럽과의 관계로 인해 협력 혐의를 받았다. 그리스 정교회안티오키아 파괴와 티무르의 침략 이후 쇠퇴했다.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종교 지도자 계승 분쟁과 교회 파괴로 인해 감소했다. 맘루크들은 킬리키아 정복 후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쇠퇴를 초래했다.

7. 1. 사회 계층

맘루크 술탄국은 맘루크라는 비아랍계 출신 지배 계층과 아랍인, 콥트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피지배 계층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맘루크는 노예 신분으로 이집트에 들어와 군사 훈련을 받고 술탄이나 아미르에게 소속되었다. 이들은 해방된 후에도 주인과의 강한 주종 관계를 유지했으며, 같은 주인을 섬긴 맘루크끼리는 동문의식을 통해 결속을 다졌다.[48]

맘루크는 능력에 따라 십인장, 사십인장, 백인장, 아미르 등으로 승진할 수 있었고,[49] 궁정 관직이나 지방 총독직을 맡기도 했다. 술탄은 이러한 동문 맘루크들 중 가장 유력한 자가 되었으며, 술탄 교체 시에는 전임 술탄의 맹우나 그가 직접 기른 맘루크 중 유력자가 새로운 술탄이 되는 방식으로 맘루크 왕조가 유지되었다.

맘루크 왕조의 술탄은 세습되지 않았고, 이집트에서 비아랍계 외래인이었다. 바이바르스 시대에는 압바스 왕조의 후예(무스탕시르 2세)를 카이로에서 명목상 칼리프로 세우기도 했다.[47] 이는 일본사에서 천황과 정이대장군의 관계,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와 유사하다. 맘루크 왕조는 이슬람 3대 성지인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보호자 역할을 하며 이슬람 관습에 따른 지배 권위를 확보하여 당시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와 바흐리 맘루크 왕조 시대에는 튀르크계 유목민, 몽골인, 쿠르드인이 맘루크의 중심이었고, 부르지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체르케스인 등 북캅카스 출신이 많았다.

7. 2. 종교

초기 맘루크 시대 이집트는 수니파 이슬람, 주요 법학 학교(마즈하브), 다양한 수피 수행단체, 이스마일파 시아파 무슬림, 콥트 정교회 기독교인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는 파티마 왕조의 종교적 관용 정책에 맞서 수니파 이슬람 부흥을 추진했고, 맘루크 술탄들은 이를 더욱 강화했다.[47] 맘루크들은 이슬람을 통해 피지배층과의 통합을 추구했으며, 수니파 이슬람 수용은 십자군과 몽골에 맞서는 주요 이슬람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했다.

맘루크들은 무슬림 지도자들을 활용하여 종교적 감정을 통제했다. 바이바르스샤피이 마즈하브를 선호하던 전통을 깨고 네 개의 주요 수니파 마즈하브(샤피이, 말리키, 한발리, 하나피) 모두에서 최고 판사(카디 알 쿠다)를 임명하여 다양한 무슬림 인구를 수용하고 각 마즈하브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샤피이 학자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렸다.

맘루크들은 제국 내 수피 수행단체를 수용했다. 13세기 이집트에서 샤드힐리야가 가장 인기 있는 수피 수행단체였으며, 유연한 종교 사상으로 현지 환경에 쉽게 적응했다. 리파이야, 바다위야와 같은 다른 수피 수행단체도 많은 추종자를 가졌다. 맘루크들은 수피 수도원(자위야)에 자금을 지원하며 수피들을 후원했다. 한발리 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엄격한 도덕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반대를 강조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제국 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은 각자의 종교 기관과 술탄의 권위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은 딤미(보호받는 사람들) 지위를 부여받았고, 지즈야(비무슬림에 대한 인두세)를 납부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으며, 기독교인들은 몽골과의 연관성 때문에 반기독교 정서에 직면했다. 민중의 반기독교 적대감은 콥트인들이 관료제 내에서 차지했던 특권적 지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바흐리 술탄 시대에 콥트인 감소가 발생했고, 부르지 정권 하에서 가속화되었다. 콥트인들은 대중적 압력으로 인해 관료제에서 여러 차례 해고되었고, 1301년에는 모든 교회 폐쇄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많은 콥트인들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이슬람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했다. 14세기에는 박해, 교회 파괴, 콥트인들의 대규모 개종이 일어났다., 맘루크 시대 말까지 이집트의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비율은 10:1로 증가했을 수 있다.

시리아에서는 맘루크들이 마론파그리스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해안 지역에서 몰아냈다. 마론파 교회는 로마 교황청 및 유럽과의 관계로 인해 협력 혐의를 받았다. 그리스 정교회는 안티오키아 파괴와 티무르의 침략 이후 쇠퇴했다.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종교 지도자 계승 분쟁과 교회 파괴로 인해 감소했다. 맘루크들은 킬리키아 정복 후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쇠퇴를 초래했다.

맘루크 왕조의 술탄은 이집트에서 비아랍계 외래인이었기 때문에, 바이바르스 시대에 압바스 왕조의 후예를 카이로에서 명목상의 칼리프로 세웠다. 또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보호자로서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었다.

7. 3. 언어

아랍어는 맘루크 술탄국의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지만, 맘루크 지배 계층은 킵차크 투르크어, 특히 맘루크-킵차크어를 구어체로 사용했다.[47] 맘루크들은 킵차크어 또는 카프카스어인 체르케스어와 같은 중앙아시아 방언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튀르크어를 자신들의 계급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여겼다.[48] 튀르크어 사용은 맘루크 지배 계층의 독특한 특징이었는데, 오직 그들만이 튀르크어를 구사하고 튀르크식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49] 맘루크 엘리트는 민족적으로 다양했지만, 튀르크계가 아닌 사람들도 튀르크화되었다. 부르지 왕조 시대에는 체르케스계 맘루크들이 튀르크어로 교육을 받았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튀르크인으로 여겨졌다.

8. 문화

맘루크 술탄국 시대에는 예술과 건축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장식 미술은 지중해와 유럽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맘루크 도시들은 무역과 소비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맘루크들은 지위 의식이 강한 후원자로서, 예술 작품과 건축물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예술과 건축 분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한 예술 형식의 장식 모티프가 건축을 포함한 다른 예술 형식에도 자주 적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맘루크 시대 예술의 전성기는 알나시르 무함마드와 카이트베이 통치 시대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예술 형식의 중요성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분류:맘루크 술탄국

분류:이집트의 문화

분류:시리아의 문화

8. 1. 예술

생 루이 세례반, 알나시르 무함마드(재위 1285-1341) 시대의 세면대. 17세기부터는 프랑스 국왕들의 세례반으로 사용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맘루크 시대의 장식 미술, 특히 에나멜과 금도금 유리, 상감 금속 세공, 목공예, 직물은 지중해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높이 평가되었으며, 현지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맘루크 유리 제품은 베네치아 유리 산업에 영향을 주었다.[31] 이란, 인도, 중국과의 무역은 더욱 광범위하여 맘루크 도시들을 무역과 소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동방에서 수입된 고급 상품들은 때때로 현지 예술 어휘에 영향을 미쳤는데, 중국 모티프가 물건과 건축물 모두에 통합된 것이 그 예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계급을 올라간 전 노예 출신인 맘루크들은 지위 의식이 강한 후원자들이었으며, 소유권을 나타내는 문장이 새겨진 사치품들을 의뢰하였다. 건축은 맘루크 후원의 가장 중요한 형태였으며, 유리 램프, 꾸란 사본, 놋쇠 촛대, 목재 미흐랍과 같이 맘루크 종교 건물을 꾸미기 위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의뢰되었다. 한 예술 형식의 장식 모티프는 건축을 포함한 다른 예술 형식에도 자주 적용되었다.

맘루크 시대 예술의 전성기는 알나시르 무함마드와 카이트베이 통치 시대였다. 어떤 예술 형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요성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에나멜 유리는 맘루크 시대 전반기에 주요 산업이었지만 15세기에 크게 감소했다. 반면에, 현존하는 양탄자의 대부분은 맘루크 시대 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도자기 생산은 전반적으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는데, 부분적으로는 중국 자기가 널리 이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본 장식 미술에서 꾸란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적 정교함으로 제작된 책이었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알레포는 사본 제작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맘루크 시대 꾸란은 풍부하게 삽화되었으며, 당시 이란 일칸 왕조에서 제작된 것과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고품질 종이가 생산됨으로써 페이지 크기가 커질 수 있었고, 이는 예술가들이 이러한 큰 형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모티프와 디자인을 만들도록 장려했다. 일부 사본은 엄청난 크기였는데, 예를 들어 아슈라프 샤반을 위해 제작된 한 꾸란 사본은 높이 75~105cm였다. 맘루크 사본 장식을 구별하는 스타일 특징 중 하나는 파스텔 색상의 배경 위에 금박으로 장식된 잎사귀 스크롤이 넓은 여백 안에 배치된 것이다. 머리말은 종종 별 모양 또는 육각형 기하학적 모티프로 장식되었다.

주전자, 세면대, 촛대 형태의 금속 제품은 다양한 맥락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예가 남아 있다. 이들은 놋쇠나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상감 장식이 있었지만, 후기에는 상감보다는 조각이 흔했다. 금속 세공의 질과 양 또한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더 높았다. 이 시대의 가장 좋은 예 중 하나는 소위 생 루이의 세례반(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으로, 아라베스크와 수평적인 동물, 사냥꾼, 승마를 하는 사람들의 장면이 상감된 큰 놋쇠 세면대이다. 후기의 예로는 카이트베이가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에 있는 무함마드의 묘소를 위해 의뢰한 일련의 촛대가 있다. 이들은 새겨진 놋쇠로 만들어졌으며, 광택이 나는 놋쇠의 모티프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 표면 일부에 검은 역청을 채웠다. 그 장식은 거의 전적으로 아랍어 캘리그래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술루스 글씨체가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

유리 램프, 특히 모스크를 위해 의뢰된 램프는 맘루크 미술의 또 다른 전성기였다. 이집트시리아는 이 시대 이전에도 풍부한 유리 제작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마스쿠스는 맘루크 시대 동안 가장 중요한 생산 중심지였다. 이전 아이유브 왕조 시대에는 색유리가 흔했지만, 맘루크 시대에는 에나멜과 금도금이 유리 장식의 가장 중요한 기법이 되었다. 모스크 램프는 넓게 퍼지는 상단부가 있는 구근 모양의 몸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수천 개가 생산되어 사슬로 천장에 매달렸다.

8. 2. 건축

맘루크 건축은 도시 내 제한된 공간과 도시 환경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시각적 우세를 확보하려는 욕구로 인해 평면 설계가 점점 더 창의적이고 복잡해진 다기능 건물의 건설로 구분된다.[32] 카이로가 주요 후원 중심지였지만, 맘루크 건축은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알레포, 메디나에서도 나타난다.[32] 술탄과 고위 에미르를 포함한 후원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위한 묘소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마드라사, 자위야|zawiyaar, 세빌|sabilar(공공 분수) 또는 모스크와 같은 자선 시설을 함께 건설했다. 이러한 자선 단지의 수입과 지출은 양도할 수 없는 와끄프|waqfar 계약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이는 후원자의 후손에게 일정한 수입이나 재산을 보장하는 부차적인 목적도 수행했다.[32]

마드라사에는 십자형 또는 사이완 평면이 채택되었으며, 전통적인 히포스타일 모스크보다 새로운 기념비적 단지에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초기의 둥근 천장 사이완은 후기에는 평평한 지붕 사이완으로 대체되었다.[32] 기념물의 장식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정교해졌으며, 석조 조각과 색상이 있는 대리석 패널 및 모자이크(아블락|ablakar 포함)가 회반죽을 가장 지배적인 건축 장식으로 대체했다. 기념비적인 장식 입구는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일반화되었으며, 종종 무카르나스|muqarnasar로 조각되었다. 시리아, 일칸 왕조 이란, 그리고 어쩌면 베네치아의 영향조차도 이러한 경향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32] 첨탑 또한 정교했으며, 일반적으로 발코니로 구분된 3층으로 구성되었고, 각 층은 다른 층과 디자인이 달랐다. 예를 들어 후기 맘루크 첨탑은 대부분 첫 번째 층에는 팔각형 몸체, 두 번째 층에는 원형 몸체, 세 번째 층에는 장식이 있는 등롱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32] 돔도 나무 또는 벽돌 구조(때로는 구근 모양)에서 복잡한 기하학적 또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외부 표면에 새겨진 뾰족한 석조 돔으로 전환되었다.[32] 이러한 석조 돔 건축의 절정은 15세기 후반 카이트베이 치하에서 이루어졌다.[32]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새로운 오스만 양식의 건물이 도입되었지만, 맘루크 양식은 많은 후대 기념물에서 반복되거나 오스만 요소와 결합되었다. 후기 맘루크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일부 건축 유형, 예를 들어 사빌-쿠타브|sabil-kuttabar(사빌|sabilar과 쿠타브|kuttabar의 조합) 및 여러 층의 카라반사라이(위칼라|wikalaar 또는 칸)는 실제로 오스만 시대에 수가 증가했다.[32] 현대 시대, 19세기 후반부터 '신맘루크' 양식도 등장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오스만과 유럽 양식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응으로 지역 '이집트' 양식을 홍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32]

9. 역대 술탄



맘루크 술탄은 최고 통치 권력자였으며, 술탄 부관(단수형: نائب السلطنة|나이브 알살타나ar)으로 알려진 지방 총독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이집트의 총독이 최고위 나이브였고, 그 다음으로 다마스쿠스, 알레포의 나이브가 있었으며, 알카락, 사파드, 트리폴리, 홈스, 하마의 나이브가 그 뒤를 이었다.

새로운 술탄이 등극할 때마다 일관된 절차가 있었다. 대부분 에미르와 맘루크 평의회(이들은 충성 맹세를 한다)에 의한 선거, 술탄의 왕위 칭호인 الملك|알말리크ar 취임, 술탄이 이끄는 카이로를 통한 국가 주도의 행렬, 그리고 술탄의 이름이 خطبة|쿠트바ar(금요일 기도 설교)에서 읽히는 것을 포함했다.

등극의 선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왕조 계승은 때때로 현실이 되었다. 특히 바흐리 왕조 시대에는 바이바르스의 아들 바라카와 솔라미시가 그를 계승했고, 그 후 칼라운이 왕위를 찬탈하여 때때로 중단이 있었지만, 그 후 4대에 걸쳐 직계 후손들이 계승했다. 부르지 왕조 시대에는 세습 통치가 훨씬 덜 빈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부르지 술탄들은 모두 혈연이나 맘루크 관계를 통해 체제의 창시자 바르쿠크와 관련이 있었다.

1382년, 바르쿠크는 칼라운 가문의 술탄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43] 바르쿠크는 체르케스인을 중심으로 한 부르지 군단 출신의 맘루크였으며, 바르쿠크 이후 맘루크 왕조의 중심이 되는 맘루크가 기존의 바흐리 맘루크에서 부르지 맘루크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맘루크 왕조를 부르지 왕조라고 부른다.

부르지 왕조에서는 술탄의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술탄은 유력 아미르들 사이에서 상호 선출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부르지 왕조의 술탄
이름재위 기간
자힐 바르크크1390년 - 1399년
나스르 파라즈1399년 - 1405년
만수르 아브드 아르아즈즈1405년
나스르 파라즈 (복위)1405년 - 1412년
무아이야드 사이프1412년 - 1421년
무자파르 아흐마드1421년
자히르 타타르1421년
사리프 무하마드1421년 - 1422년
아쉬라프 바르스바이1422년 - 1438년
아지즈 유스프1448년
자히르 자크마크1438년 - 1453년 (1448년 복위)
만수르 우스만1453년
아쉬라프 이날1453년 - 1460년
무아이야드 아흐마드1460년 - 1461년
자히르 후스카담1461년 - 1467년
자히르 야르바이1467년 - 1468년
자히르 티무르부가1468년
아쉬라프 카이트바이1468년 - 1495년
나스르 무하마드1495년 - 1498년
자히르 칸스프1498년 - 1499년
아쉬라프 자바라트1499년 - 1501년
아딜 트만바이1501년
아쉬라프 칸스프 가우리1501년 - 1516년
아쉬라프 트만바이1516년 - 1517년


9. 1. 바흐리 왕조

13세기 중반,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가 급사했다. 살리흐의 충실한 맘루크 군단인 바흐리야(Bahriyya Mamluks)는 살리흐의 부인이자 노예 출신 여성이었던 샤자르 알두르를 지도자로 삼아, 1250년 마수라 전투에 이어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루이 9세를 포로로 잡고 십자군을 격퇴했다.[33] 이후 쿠데타를 통해 살리흐의 아들(샤자르 알두르의 아들이 아닌) 투란 샤를 살해하고 샤자르 알두르를 여성 술탄으로 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33] 여성 술탄에 대한 맘루크 이외의 무슬림들의 저항이 거셌기에, 같은 해 샤자르 알두르는 바흐리야의 최고 실력자인 아이바크와 재혼하고 아이바크에게 술탄 자리를 양위했다.[34] 이후 맘루크 출신자들이 이집트 술탄이 되면서, 샤자르 알두르 또는 아이바크를 맘루크 왕조의 초대 술탄으로 여기게 되었다.

아이바크는 과거 바흐리야 동료 맘루크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소유인 맘루크들을 등용하여 권력을 확립했지만, 바흐리야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유지하던 샤자르 알두르와 대립하다가 암살당했다.[35] 샤자르 알두르 역시 곧 살해되었고, 아이바크의 맘루크들 중에서 쿠투즈가 부상하여 술탄이 되었다.[35]

1260년, 몽골의 훌레구의 군대가 시리아로 진격하자(몽골의 레반트 침공), 쿠투즈는 바흐리야의 지도자 바이바르스와 화해하고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 후 귀환 길에서 다시 쿠투즈와 대립한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진중에서 살해하고 스스로 술탄이 되었다.[36]

맘루크 왕조의 실질적인 건설자 바이바르스는 훌레구가 세운 일 칸국과 시리아에 남아있던 십자군 국가의 잔여 세력과 싸웠고, 1277년 사망할 때까지 맘루크 왕조의 영토를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확장했다.

아이바크 이후 맘루크 왕조 전기는, 바이바르스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아이유브 왕조의 살리흐가 세운 바흐리야 출신자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맘루크 왕조는 바흐리 맘루크 왕조라고 불린다.

바이바르스 사후, 그의 자녀인 바라카, 살라미시가 잇따라 술탄이 되어 바이바르스가의 술탄 지위 세습이 시도되었으나, 바이바르스의 동료이자 바흐리야의 제1인자였던 장군 칼라운에 의해 그들은 잇따라 폐위되었고, 1279년, 칼라운이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37] 칼라운은 바이바르스의 정책을 계승하여 이집트의 국가 건설을 진척시키는 동시에 시리아에서의 군사 작전을 활발히 벌여, 1291년, 칼라운의 아들 아슈라프 칼릴 때 시리아에 남은 십자군 세력의 마지막 영토였던 아크레를 정복하여[38]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이래의 십자군과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강력한 군주였던 칼라운 사후, 맘루크 왕조의 중앙 정치는 혼란에 빠졌다. 아슈라프는 즉위 얼마 되지 않아 살해되었고,[39] 어린 동생 나시르 무함마드가 술탄이 되었으나, 곧 칼라운의 수하 맘루크들과 아슈라프의 맘루크들 사이에서 정권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나시르는 폐위되었다.[40] 결국 칼라운파 맘루크이 승리하여 나시르는 실권 없는 술탄으로 복위되었고, 1310년에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 마침내 친정을 확립했다.[41]

나시르는 자신의 수하 맘루크들을 등용하고, 영내의 검지를 실시하여 충실한 아미르(맘루크의 장군)에게 이크타(징세권)를 수여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나시르 치하에서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맺고 일 칸국과의 화해도 도모하여, 맘루크 왕조의 내외 정세는 안정되었고, 수도 카이로는 국제적인 상업 도시이자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학술 도시로 번영했다.

1324년경, 메카 순례 길에 있던 말리 제국의 만사 무사 왕이 카이로에 들러 나시르에게 대량의 금을 선물했기 때문에 카이로의 금값이 하락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말년의 나시르는 사치에 빠져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맘루크의 세력이 강대해졌다.

나시르 사후, 그의 수하 아미르들은 그의 자손을 술탄으로 세워 꼭두각시로 삼았고, 실권 없는 칼라운가의 세습 지배가 40년간 지속되었다.[42] 가장 유력한 아미르는 대아미르와 아타벡을 겸임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그 지위를 둘러싼 정쟁도 심했고, 술탄과 대아미르의 실각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9. 2. 부르지 왕조

1382년, 바르쿠크는 칼라운 가문의 술탄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43] 바르쿠크는 체르케스인을 중심으로 한 부르지 군단 출신의 맘루크였으며, 바르쿠크 이후 맘루크 왕조의 중심이 되는 맘루크가 기존의 바흐리 맘루크에서 부르지 맘루크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맘루크 왕조를 부르지 맘루크 왕조 또는 체르케스 맘루크 왕조라고 부른다.

부르지 맘루크 왕조에서는 술탄의 세습이 이루어지지 않고, 술탄은 유력 아미르들 사이에서 상호 선출되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 제도 때문에 아미르들은 술탄 후보가 될 유력 아미르 휘하에서 군벌을 형성했고, 군벌 간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맘루크들 간의 내분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르지 왕조의 술탄
이름재위 기간
자힐 바르크크1390년 - 1399년
나스르 파라즈1399년 - 1405년
만수르 아브드 아르아즈즈1405년
나스르 파라즈 (복위)1405년 - 1412년
무아이야드 사이프1412년 - 1421년
무자파르 아흐마드1421년
자히르 타타르1421년
사리프 무하마드1421년 - 1422년
아쉬라프 바르스바이1422년 - 1438년
아지즈 유스프1448년
자히르 자크마크1438년 - 1453년 (1448년 복위)
만수르 우스만1453년
아쉬라프 이날1453년 - 1460년
무아이야드 아흐마드1460년 - 1461년
자히르 후스카담1461년 - 1467년
자히르 야르바이1467년 - 1468년
자히르 티무르부가1468년
아쉬라프 카이트바이1468년 - 1495년
나스르 무하마드1495년 - 1498년
자히르 칸스프1498년 - 1499년
아쉬라프 자바라트1499년 - 1501년
아딜 트만바이1501년
아쉬라프 칸스프 가우리1501년 - 1516년
아쉬라프 트만바이1516년 - 1517년


10. 멸망

셀림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은 1514년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를 크게 무찌르고, 사파비 왕조를 지원하지 않은 맘루크의 봉신 듈카디르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26] 1516년, 셀림 1세는 이집트 정복을 목표로 대규모 군대를 모았지만, 이를 숨기기 위해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그 속국들은 오스만 제국에 합병되었다. 맘루크 기병은 오스만 포병과 예니체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516년 8월 24일 마르지 다비크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알-구리가 이끄는 맘루크 군대를 격파했다.[26] 알레포 총독 카이르 바크는 셀림과 비밀리에 공모하여 전투 중 병력을 이끌고 이탈하여 알-구리를 배신했고, 혼란 속에서 알-구리는 사망했다.[26] 살아남은 맘루크 군대는 알레포로 돌아왔지만, 도시 입성을 거부당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 공격을 받았다.[26] 시리아는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고,[27] 많은 지역에서 오스만군을 맘루크로부터의 해방으로 환영했다.

맘루크 술탄 알-구리의 목이 셀림 1세에게 보내지는 모습을 그린 오스만 그림


맘루크 왕조는 1517년까지 잠시 더 존속했다. 알-구리가 카이로의 부관으로 남겨두었던 투만 바이는 1516년 10월 10일 급히 술탄으로 선포되었다. 에미르들이 가자에서 오스만군의 진격을 막자는 그의 계획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카이로 북쪽 알-라이다니야에서 최후의 방어를 준비했다. 1517년 초, 투만 바이는 맘루크 군대가 가자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알-라이다니야에서의 오스만 공격은 1517년 1월 22일 방어군을 압도하고 카이로에 도달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맘루크, 지역 주민, 오스만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도시에 큰 피해를 입히고 3일간 약탈이 이어졌다. 셀림은 1월 31일 사면을 선포했고, 그때 남은 맘루크 대부분이 항복했다. 투만 바이는 남은 병력과 함께 중부 이집트의 반하사로 도망쳤다.

셀림은 처음에 맘루크 술탄에게 오스만의 봉신으로서 평화를 제안했지만, 그의 사절들은 맘루크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투만 바이는 4,000명의 기병과 약 8,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1517년 4월 2일 기자 근처에서 오스만군과 최후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사로잡혔다. 셀림은 그를 살려둘 생각이었지만, 카이르 바크와 또 다른 옛 맘루크 지휘관인 잔비르디 알-가잘리가 투만 바이가 살아남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오스만 술탄을 설득했다. 결국 마지막 맘루크 술탄은 1517년 4월 13일 카이로의 문 중 하나인 밥 주웨일라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르지 다비크에서의 배신에 대한 보상으로 셀림은 카이르 바크를 이집트의 오스만 총독으로 임명했다. 잔비르디는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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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undefined 大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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